이미숙
이미숙은 한국의 대표적인 중년 여배우 중 한 명으로, 1980년대를 대표하는 ‘트로이카 3인방’ 중 원미경, 이보희와 함께 손꼽힙니다. 이 셋 중 그녀는 가장 화려한 커리어를 가진 것으로 여겨집니다.
전성기 시절, 강한 예술적 비전을 지닌 많은 명감독들이 그녀를 작품에 캐스팅하고자 했습니다. 그녀의 연예계 여정은 1978년 ‘미스 롯데’ 타이틀 수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다음 해 약 20세 무렵 TBC 드라마 《Maponaru》로 연기 데뷔했습니다.


이후 26편 정도의 영화에 출연하며 영화계의 인기 배우로 자리매김했고, 결혼 전 마지막 영화인 《The House of Two Women》 출연 이후, 데뷔 4년 만에 《That Winter Was Warm》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큰 히트를 기록한 《The House of Two Women》 이후 돌연 활동을 중단했고, 많은 팬들이 그녀의 갑작스러운 부재에 실망했습니다.
이미숙
10여 년간 연예계를 떠났다가, 이혼 후 영화 《Affair》로 강렬하게 복귀하며 장기 팬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았고, 복귀작은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후 영화와 드라마에서 활발히 활동하며 《Besame Mucho》, 《Scandal: The Tale of Joseon’s Noble Women》, 《Scoop》 등 주요 작품에 출연했습니다.


1960년생으로 60대에 가까워도 여전히 청량한 외모와 강한 화면 존재감으로 관객을 사로잡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 출연작은 2019년 영화 《Today, I Learn》으로, 관심을 모았지만 이후로는 연기 활동을 이어가지 않았습니다.
원미경
원미경은 3세대 대표 여배우로, 1980년대와 1990년대 가장 사랑받는 스타 중 한 명입니다. 청룡영화상, 대종상, 백상예술대상 등에서 여우주연상을 여러 차례 수상하며 실력을 인정받았습니다.
텔레비전 부문에서도 백상TV 연기상, MBC 드라마 대상, 방송대상 탤런트상을 수상하며 명성을 이어갔습니다.


1978년 제3회 미스 롯데 대회에서 1위를 차지하며 데뷔했고, 다음 해 영화 《Trap of Youth》 주연에 발탁되어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습니다.
드라마 《When Tomorrow Comes》, 《A Happy Woman》, 《Living》, 《Eun‑sil》 등과 영화 《Janyeomok》, 《Sano》 등의 주요 작품에도 출연했습니다. 고(故) 배우 최진실은 인터뷰에서 그녀를 롤모델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원미경
원미경은 프로듀서 이창순과 결혼해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가정 생활에도 불구하고 연기 경력을 이어갔으며, 1990년 《Just Because You Are a Woman》으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1991년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가정주부로 전향한 후에도 영화와 드라마 활동을 지속하며 강한 존재감을 유지했습니다. 2000년대에는 ‘세 번째 전성기’라 불리며 연기대상과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여우주연상을 연달아 받으며 인기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2002년 MBC 드라마 《Confession》을 끝으로 가족과 함께 미국 워싱턴 D.C. 근교에서 전업주부로 평온한 생활을 한다고 밝혔습니다.
14년 후인 2016년 드라마 《Family Hwa Man Sa Seong》(가칭)으로 복귀해 일관된 연기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20년 TVN 드라마 《We Are Family (I Don't Know Much, But...)》에서 ‘진숙’ 역으로 또다시 팬들의 호평을 받았습니다.
차화연
여배우 차화연은 1978년 미스 롯데 2위 수상 후 연기활동을 시작했으며, 《Geumnam's House》, 《Sparrow and Scarecrow》, 《Cicadas Crying in the City》 등 다수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1987년 《Love and Ambition》에서 김미자 역으로 출연하며 전국적인 인기를 얻었고, 광고 모델로도 활약했습니다. 이러한 성공에 힘입어 그녀는 인기 있는 광고 모델이 되었고 다른 프로젝트에서도 다양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Love and Ambition》 종영 후인 1988년, 10세 연상의 사업가와 결혼하며 연예계를 떠나 두 아들, 딸의 어머니로서 가족에 집중했습니다.
20년간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다가 곽영범 PD와의 인연으로 2008년 드라마 '애자네 언니 민자'로 복귀했습니다. 복귀 1년 만에 남편과 원만하게 이혼했습니다.
차화연
복귀 당시 따뜻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선보였으나, 이후 꾸준한 식이요법과 운동을 통해 외모를 변화시켜 자신감 있고 카리스마 있는 존재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018년 드라마 《My Only One》에서 큰 연기대상을 수상하며 제2의 전성기를 맞았다는 평가가 나옵니다. 언론에 따르면 복귀 이후 연기 공부에 매진하며 최소 매년 한 편의 드라마에 출연하겠다는 목표를 세워 왔다고 합니다.


이후 《Once Again》(2020년)에서 장옥분 역, 《A Gentleman and a Lady》(2021년)에서 왕대란 역을 맡았으며, 이는 《My Only One》의 작가 김사경과 두 번째 협업이었습니다.
김청
김청은 1981년 미스 MBC 대회에서 2위에 오른 후 1982년 연예계에 입문했으며, 1980년대 순수함의 상징으로 빠르게 사랑받았습니다. 전성기 시절에는 배우 활동뿐 아니라 이덕화와 함께 1980년대 인기 예능 프로그램《Saturday Saturday is Fun》의 공동 MC로 활약했습니다.
대표 드라마로는 《Sassy Girl Chunhyang》, 《Inheritance》, 《Flowers that Bloom at Dusk》 등이 있으며, 주요 영화로는 《Who Plucked the Red Rose》, 《A High School Girl Getting Married》, 《Cohabitation, Dongrak》 등이 있습니다.


특히 1987년 드라마《Love and Ambition》에서 우은환 역으로 출연했을 때 인기가 크게 상승했습니다. 김청은 순수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뿐 아니라 따뜻한 마음씨로도 널리 존경받았으며, 스태프와 동료를 세심하게 챙기는 모습이 자주 회자되었습니다.
촬영 중 수백 개의 도시락을 준비하고 담요를 제공하는 등 베풂과 인간미를 보여주었으며, 이러한 배려 깊은 성격 때문에 많은 배우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 하는 인물로 여겨졌습니다.
김청
김청은 현재까지도 연예계에서 활동 중이지만, 한때 5년간의 긴 공백기를 겪은 바 있습니다. 1998년 36세에 사업가 배준성 씨와 결혼했으나 단 3일 만에 결혼 생활이 끝났고, 이 사건은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이혼한 여배우들이 복귀하기 매우 어려웠으며, 이혼 후 언론의 혹독한 집중 보도 속에서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2000년대에는 복귀하여 KBS2를 비롯한 다양한 프로그램에 정기적으로 출연하며 경력을 재정립했고, 숙련된 배우로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21년 《Let's Live Together Season 3》(KBS2)에 박원숙과 함께 출연해 짧은 결혼과 3일 만의 이혼 루머를 직접 언급하며 공개적으로 과거를 솔직히 이야기해 시청자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정애리
배우 정애리는 KBS 드라마 신인 오디션을 통해 10대 시절 연예계에 데뷔했습니다. 초기에는 연기력에 대한 비판도 있었지만, 그녀의 노력은 곧 폭넓은 찬사로 이어졌습니다.
드라마 《Love and Truth》로 스타덤에 오르며 전성기를 맞았고, 당시 최고 인기 여배우에게만 주어지는 화장품 광고 모델도 맡았습니다.


1985년 제21회 백상예술대상 TV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녀의 위상이 확고해졌습니다.
드라마뿐 아니라 《Three Women Under an Umbrella》, 《Stray Dogs》 등의 영화에도 출연했습니다. 그러나 1985년 전성기의 절정기에 잠시 결혼하고 동시에 연예계를 떠나 미국으로 이주했습니다.
정애리
1988년 한국으로 돌아온 후, 이혼 뒤 드라마 《Rose of Betrayal》로 연기 복귀했습니다. 1999년 이후부터는 《Couple Clinic: Love and War》, 《You Are My Destiny》 등을 통해 꾸준히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전성기만큼의 인기는 아닐지라도, 다양한 드라마와 연극에서 선·악을 넘나드는 폭넓은 캐릭터 소화를 통해 배우로서의 존경을 얻었습니다.


특히 《Woman of the Sun》과 《You Are My Destiny》에서 주인공의 양어머니 역을 맡으며 ‘국민 양어머니’라는 애칭을 얻었습니다.
연기 활동 외에도 전통 차 브랜드 담터의 오랜 모델로 잘 알려져 있으며, 2020년 기준 무려 17년간 브랜드 모델로 활약하여 ‘인간 담터’라는 별명도 생겼습니다.
유지인
유지인은 정윤희, 장미희와 함께 1970년대를 대표했던 인기 여배우 트로이카의 일원입니다.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73년 무대 배우로 데뷔했고, 같은 해 TBC 동양방송 제14기 공개 탤런트로 선발되었습니다.
1974년 중앙대학교 연극영화과 신입생 때 대학 잡지 표지 모델로 주목받았고, 2,300여 명의 응시자 중에서 경쟁을 뚫고 영화 《Your Cold Hands》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국내 화장품 전속 모델로 발탁되며 인기가 폭발했고, 《Cheongsilhongsil》과 《Seoul Nocturne》 등의 흥행작으로 선도적인 영화 배우로 자리 잡았습니다.
대표 흥행작으로는 《The Last Winter》, 《The Man I Left Behind》, 《26×365=0》, 《Trap of Youth》, 《The Happiness of an Unhappy Woman》 등이 있으며, 이 중 《Simbatore》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했습니다.
유지인
유지인은 그 시대를 대표하는 여배우였으며, “존경받는 여성” 순위와 연예인 수입 랭킹에서 1위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그녀의 막강한 인기는 1982년 북한 김정일의 조카인 이동영 씨가 탈북 후 광고판에서 그녀를 알아본 일화로도 유명합니다.


그녀는 인기뿐 아니라 지성으로도 인정받았으며, 1950년대 출생 여배우 중 처음으로 석사학위를 취득해 주목을 받았습니다.
1986년 치과의사와 결혼하며 연예계를 떠났지만, 2002년 이혼 후 다시 복귀했습니다. 현재는 한국예술원(KAC) 교수로 재직 중이며, 교육과 강연 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습니다.
장미희
장미희는 유지인, 정윤희와 함께 1970~80년대 가장 인기 있었던 여배우 중 하나였습니다. 원래 초등학교 교사가 되는 꿈을 가졌지만, 언니의 권유로 미술 대회에 참가해 춘향전 역할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1976년 박태원 감독의 신인 배우 모집을 통해 영화 데뷔했으며, 276명의 후보를 제치고 성춘향전에서 춘향 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이후 영화 《Winter Woman》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당시 해방 이후 최고 관객 수인 58만 명을 기록했습니다.


기타 주목할 만한 영화로는 《Three Times Short, Three Times Long》과 《Lover》가 있으며, 《Flower of the Equator》는 박스오피스 히트를 기록하며 그녀에게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주었습니다. 잘 알려진 드라마로는 《Cheongsilhongsil》, 《Bibaram Chamisul》, 《Jirekkot》 등이 있습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1979년은 그녀가 납부한 소득세 기준으로 당시 최고 수입 여배우였습니다.
장미희
1980년대 후반 장미희는 드라마 《Hwang Jin‑i》에 출연했으나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흥행에도 실패했습니다. 그러나 1989년에 이덕화와 함께 출연한 영화 《The Kingdom of Fire》로 성공을 회복하며 상업적으로 큰 흥행을 거두었습니다.


1990년대 내내 《Ode to Death》, 《Annie Gang》, 《Six Siblings》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하며 활발히 활동했습니다. 전반적으로 장미희는 70~80년대 트로이카 여배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강력한 배우로 평가받으며, 영화 흥행 기록을 두 차례 경신했습니다. 또한 패션계와도 연이 깊어,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의 공식 스폰서를 받은 최초의 여배우가 되기도 했습니다.
정윤희
정윤희는 장미희, 유지인과 함께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트로이카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배우로 칭송받으며 대한민국 시대의 아이콘 뷰티로 널리 인정받았습니다.
일설에는 단군 이래 최고의 미인이라는 평가도 있었고, 일본 한 영화감독은 "일본 최고 여배우 100명을 합쳐도 정윤희의 매력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전해집니다.


베테랑 카메라맨도 그녀의 명장면을 극찬하며, 화면 어디에 등장하든 완벽했다고 언급했습니다. 정윤희는 1975년 영화 《Desire》로 데뷔했으나 상업적 성공은 크지 않았습니다. 이후 해태제과 모델로 발탁된 후 인기가 상승했고, 1977년 드라마 《Cheongsilhongsil》의 대히트로 진정한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정윤희
1979년 정윤희는 《The Hunters of the City》, 《When Love Deepens》, 《Weekly Day》, 《A Deeper Sleep Than Death》 등 네 편의 히트작을 한 해에 출연하며 영화계에서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 해에 네 편의 성공작을 남긴 성과는 지금도 드물게 여겨집니다.
같은 해 드라마 《Hey, Gomryeya》로도 큰 인기를 얻었고, 1980년대를 거치며 누드 호스트 무비와 멜로 드라마를 오가며 선두 주자로서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1984년 중앙건설 회장 조규영과 결혼한 뒤 연예계를 은퇴했습니다. 조명에서 물러난 후, 2011년 약물 중독 관련 심정지로 아들이 사망하는 비극으로 대중의 동정 대상이 되었습니다. 이후 MBC 추석 특집 《Cafe 정윤희》에서 팬들의 출연 요청에도 정윤희는 직접 출연하지 않고 편지와 꽃을 보내며 지지자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했습니다.
황신혜
배우 황신혜는 1980년대 놀라운 미모로 '컴퓨터 미인'이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1983년 제16기 MBC 탤런트로 데뷔한 이후, 당시 10명 중 9명은 그녀를 그 시대 한국 최고의 미인으로 꼽았을 정도였습니다.


1980년대 수많은 멜로 드라마의 주연으로 부상하며 대중적 인지도를 얻었고, 1990년대에는 드라마 《Lover》를 통해 사회적 열풍을 일으켰습니다. 당시 30대였음에도 그녀의 머리핀, 화장품, 가방 등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습니다.
이후 MBC 주말드라마 《Cinderella》에서 눈에 띄는 감정 연기로 깊은 인상을 남겼고, 다수 시상식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2000년대에는 드라마 《Man in Crisis》에 출연해 시청률 30%라는 높은 수치를 기록했습니다.
황신혜
전성기 시절, 황신혜의 스타일은 수많은 여성들 사이에서 복제되었으며, 그녀가 입고 쓰는 의상과 액세서리는 당시의 트렌드를 선도했습니다. 데뷔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 광고에 출연했으며 다채로운 활동을 펼쳤습니다.


전성기만큼 활발하지는 않지만, 여전히 방송 활동을 통해 대중에게 얼굴을 비추고 있습니다. 1997년 《Cinderella》 이후 여러 드라마 출연 제의를 받았지만 잠시 쉬기로 결정했고, 2000년 드라마 《Legend of Love》로 복귀했습니다. 다만 《Match Made in Heaven》, 《Rosy Life》, 《Sweet Spy》, 《Come Back, Soon‑ae》 등 일부 작품은 고사한 것으로 보도되었습니다.
결국 2009년 《The Princess Returns》로 완전히 복귀했고, 이후에도 배우로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딸 이진이는 YG K Plus 소속 모델로, 2015~2016년 드라마 《What’s Wrong with Mom》에 모녀가 함께 출연했습니다.
이상아
이상아는 1980년대와 1990년대 초반 10대 스타로 급부상했습니다. 1984년 중학교 1학년 때 드라마 《Standing in the Mountain》으로 연기 데뷔했으며, 같은 해 광고 모델로 활동을 시작했다가 1985년 영화 《Gilsottum》으로 영화 데뷔했습니다.


데뷔 이후 수많은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하며 80년대와 90년대에 걸쳐 10대 아이돌로 큰 인기를 얻었고, 특히 중고등학생들 사이에서 ‘북엔드 스타’로 불리며 이이미연과 함께 주목받았습니다.
인기가 커지면서 영화 《Watercolor on a Rainy Day》, 《My Secret Diary》, 드라마 《Last Match》 등에서 주연을 맡았고, 대학생들 사이에서도 높은 공감을 얻었습니다. 각종 광고에도 출연하며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대표적인 10대 스타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상아
이상아는 1997년 동갑 코미디언 김한석과 결혼했지만 1년 만에 이혼했습니다. 이후 연예계에서 잠시 자취를 감췄다가 2015년 영화 《Madonna》와 드라마 《Pure You》로 9년 만에 복귀했습니다. 2000년 가수 겸 영화 제작자 전철과 재혼했으나 1년 만에 결별했습니다.


2003년에는 윤기영과 결혼했으며, 2016년 이혼 소식이 전해질 때까지 한때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많은 팬들이 실망했습니다. 그녀의 사생활, 특히 세 번의 결혼과 이혼 이야기는 《Heard It Through the Grapevine》에 출연하면서 다시 화제가 되었습니다.
가장 최근 출연은 2019년 딸 윤서진과 함께한 《Leaving the Nest Season 3》였지만, 과거의 세 번 결혼과 이혼 이력으로 인해 온라인에서 심한 비난을 받았습니다. 계속된 악플에 대해 마라톤 엔터테인먼트를 통해 딸과 자신을 향한 혐오 게시물 작성자들을 상대로 법적 대응을 시작했다고 밝혔습니다.
하희라
하희라는 1980년대 중후반 10대 스타로 급부상했습니다. 1985년 10대 드라마 《High School Diary》에서 연기 데뷔했으며, 1986년 KBS 사극 《노다지》에서의 역할로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젊은 역할을 주로 맡았지만, 1988년 《Sky, Sky》와 1990년 《What Women Live For》에서의 영채 역을 통해 성숙한 연기를 보여주며 성인 여배우로서의 자리매김에 성공했습니다.


이후 주말 드라마 《What Is Love》에 출연하며 1990년대 이후 드라마 평균 시청률 최고 기록을 세웠고, 그 시대 톱 스타 중 하나로 확실히 자리 잡았습니다. 1993년에 배우 최수종과 결혼하고 한국 국적을 취득했으며, 같은 해 드라마 《Mundong》에서 주연을 맡아 24세의 나이로 대상까지 수상하며 평단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결혼 후에도 꾸준히 활동을 이어가며 leading actress로서의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하희라
하희라와 남편 최수종은 한국 연예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부부 중 하나로, 결혼 이후에도 함께 방송에 자주 등장하며 모델 커플로 존경받고 있습니다. 최수종은 1993년부터 하희라에 대한 변함없는 애정을 공개적으로 표현하며 많은 이들의 부러움을 샀습니다.


최근 그들은 《Mr. House Husband 2》의 MC를 맡아 시청률 12%를 넘었으며, 자연스러운 케미와 일상적인 부부 생활이 시청자들의 큰 공감을 얻었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SBS 예능 《Shoes Off and Single for Men》에 함께 출연해, 결혼 28년 만에 처음으로 따로 방을 쓴다는 사실을 공개해 화제를 모았습니다. 이는 최수종의 부상으로 인해 따로 방을 써야 했던 상황이었고, 시청자들 사이에서 웃음과 안도감을 동시에 불러일으켰습니다.
채시라
채시라는 1982년 잡지 표지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했으며, 1983년 오리온 소화제 광고를 통해 공식 데뷔했습니다. 1984년 롯데 가나 초콜릿의 얼굴이 되면서 일찍이 주목을 받았고, 1985년 드라마 《High School Diary》로 10대 스타로 급부상하며 순수한 미모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그녀의 커리어 전환점은 1988년 MBC로 이적해 드라마 《Eyes of Dawn》에서 등장인물 윤여옥을 연기하며 찾아왔습니다. 비극적 인물을 감정적으로 강렬하게 소화하며 성숙한 여배우로서의 변신을 보여줬고, 뛰어난 미녀 스타로서의 명성을 확고히 했습니다. 이후 드라마 《Son and Daughter》와 《The Moon of Seoul》 등 인기 작품에서 주목받으며 재능 있고 사랑받는 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채시라
채시라는 2000년 3월 가수 김태욱과 결혼했으며, 아들과 딸을 두고 있습니다. 결혼 직후인 2000년 가을 드라마 《Long Live Women》으로 복귀해 최고 시청률 36.5%를 기록하며 성공적인 컴백을 했습니다. 결혼 후에도 꾸준한 작품 활동으로 인기를 유지했습니다.


2000년대 초 잠시 부진을 겪었지만, 2004년 KBS 주말드라마 《Conditions of Endearment》으로 다시 스타 지위를 회복하며 세련된 성숙 연기와 높은 시청률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2000년대 내내 연기 활동과 사회 공헌을 병행했으며, 남편 김태욱과 함께 여성가족부의 ‘해피 패밀리’ 캠페인 및 ‘사랑의 열매’ 등 사회복지 활동에 홍보대사로 참여했습니다.
이연수
이연수는 1980년 MBC 어린이 합창단으로 시작하여, 1981년 드라마 《Tiger Teacher》에서 5학년 5반 부반장 역으로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하희라, 김혜선과 함께 고등학생 스타로 빠르게 떠올랐습니다.
동시대 배우들이 연기에 집중한 반면, 이연수는 순수하고 깨끗한 이미지로 광고 모델로서 독보적인 입지를 다졌습니다. 전성기에는 약 50편의 광고에 출연했으며, 연간 모델 수입은 당시 아파트 가격에 맞먹는 800만 원에 달했습니다.


특히 동아제약 ‘가그린’ 광고와 LG전자 골드스타 미니카세트 ‘Aha’ 광고가 인상적이었습니다. 1980년대 내내 광고계의 강자로 군림했지만, 1993년 영화 《Walk to the Sky》의 조연 이후 점차 활동이 줄었고, 결국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이연수
12년의 공백 후, 이연수는 2005년 중국에서 복귀했습니다. 전성기만큼 활발하진 않았지만 점차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2016년 4월 예능 프로그램 《Flaming Youth》에 출연해 데뷔 당시와 변함없는 미모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2018년 1월에는 그녀의 37년 경력 중 처음으로 공식 에이전시 ‘마마무 크리에이티브’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최근에는 SBS PLUS 예능 《Are You Eating?》에 김수용, 한영과 함께 출연해 과거 인기를 회상했습니다.
프로그램에서 과거 광고 활동과 수입을 솔직하게 언급하고, 결혼과 이혼 루머도 직접 이야기하며 팬들과의 거리를 좁혔습니다.
김혜선
김혜선은 중학교 시절 학교 바자회를 홍보하러 광고 제작사를 방문했다가 촬영기사에게 발탁되어 우연히 모델로 데뷔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오리온, 롯데삼강, 한국화장품 등 대기업 광고에 다수 출연하며 인기를 얻었습니다.


고교 3학년 시절 《Blue Classroom》 드라마로 연기 데뷔하여 밝고 순수한 이미지로 고교생들에게 큰 사랑을 받았습니다. 초기에는 일본에서 ‘시라카와 쇼코’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특히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았습니다.
이후 영화 《Walk to the Sky》로 전성기 정점을 찍었고, 2011년 영화 《Perfect Partner》에서는 첫 누드 연기를 선보이며 20년 만에 새로운 연기 변신을 시도해 큰 화제를 모았습니다.
김혜선
김혜선은 1995년 결혼 후 미국으로 이주했지만 3년 만인 1998년 한국으로 돌아와 드라마 《River of Motherly Love》로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2003년 이혼 후, 2004년에 사업가와 재혼했으나 2009년 다시 이혼했습니다. 2015년 예능 《Flaming Youth》에 출연해 자신의 삶을 솔직히 털어놓았습니다.


김혜선은 보통 온화하고 차분한 조연 연기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습니다. 대표작으로는 《The King’s Flower Fairy》의 부용화, 《동이》의 정상궁, 《유명한 7공주》의 덕필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악역 연기에서는 엇갈린 반응을 얻었고, 특히 《청담동 스캔들》의 강복희 역은 과장된 표정 탓에 호평보다는 비판이 많았으며 ‘Angry Hye-sun’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습니다.
최수지
배우 최수지는 1980년대 순수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1987년 KBS 제12기 탤런트 공채로 연예계에 데뷔했으며, 드라마 《Love Blooms》에서 미술과 학생 석영 역을 맡아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전환점은 드라마 《Land》에서 서희 역으로 스타덤에 오르며, 1988년 KBS 드라마대상 신인여우상을 수상했습니다.


비록 경력은 짧았지만 자연스러운 미모와 안정된 연기력으로 10대부터 50대까지 폭넓은 연령대를 설득력 있게 소화하며 시청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Land》의 성공 이후 많은 드라마에서 러브콜을 받았지만, 1996년 이후부터 출연은 점차 줄어들었습니다.
1990년에는 당시 김청과 약혼 중이었다는 한국계 미국인 윤 씨와 결혼했으나, 이것이 그녀가 "다른 여성의 약혼자를 빼앗았다"는 비난을 불렀습니다. 그러나 결혼은 6개월 만에 이혼으로 끝났습니다.
최수지
이혼 후 최수지는 영화 《For Agnes》로 성공적인 복귀를 했으며, 이 작품은 흥행에도 성공했습니다. 그 후 여러 작품에 출연했지만, 1997년 미국 군의관과 재혼 후 미국으로 이민하며 연예계를 떠났습니다.


2004년 드라마 《Ice Princess》에 잠시 복귀했지만, 그 후로는 연기 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최수지는 화가로서 제2의 커리어를 시작했습니다. 삼성미술대전 특별상을 받은 후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시작했으며, 2006년부터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개인전을 여는 등 작품 활동에 전념하고 있습니다.
이보희
이보희는 1980년대를 대표하는 여배우 중 한 명으로 평가됩니다. 1979년 MBC 제11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으며, 초기에는 조용한 활동이었지만, 이장호 감독의 눈에 띄어 영화 《일송정 푸른 솔잎 아래》에서 조연으로 출연하며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그 이후 영화 《바보 선언》에서 가짜 대학생 역할로 출연해 대중의 인지도를 크게 높이며 본격적인 스타 반열에 올랐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녀의 예명 “이보희”는 이장호 감독이 자신의 성을 따서 지어준 것입니다. 그녀의 주요 영화 출연작으로는 《무릎과 무릎 사이 Between Knees》, 《어우동》, 《이장호의 외국인 야구단》, 《길 위에서 쉬지 않는 여행자》 등이 있으며, 1980년대 영화 배우로 활발히 활동한 뒤 1990년대부터는 드라마 중심으로 전향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천하제일 허준왕후 천하다》, 《당신은 어느 별에서 왔니》, 《런 맘》, 《내 천국》, 《괜찮아 쿵쾅 자매》 등이 있습니다.
이보희
이보희는 1980년대 가장 상징적인 여배우 중 하나로 여겨졌지만, 전성기는 비교적 짧았습니다. 그녀는 작품성과 흥행을 모두 갖춘 연기자로서 백상예술대상을 포함한 여러 주요 상을 수상했지만, 1988년 결혼 후 잠시 은퇴하면서 경력이 중단됐습니다.


당시 같은 시기 활동했던 원미경, 이미숙과 달리, 휴식 이후 이보희는 같은 지속적인 성공 수준을 보이지 못했지만, 전성기에는 눈에 띄는 외모와 관능적 매력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습니다. 다만 연기력은 동료들에 비해 일부 약하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흐르며 중년 및 조연 역할로 무난히 전환했으며, 점차 연기 스펙트럼을 넓혀왔습니다. 현재도 드라마와 방송에서 꾸준히 활동하며 다재다능하고 오래가는 배우로 입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강수연
강수연은 1980년대 후반부터 1990년대 초까지 최고의 한국 여배우 중 한 명이었으며, 한국 영화계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배우로 평가받습니다. 1969년 동양방송 아역으로 시작해, 1983년 드라마 《High School Diary》로 전국적인 인기를 얻으며 당시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책받침 여신"으로 불렸습니다.


성인 연기로의 전환은 1985년 영화 《Whale Hunting 2》에서 시작되었으며, 이후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아 대종상과 영화평론가상 남우주연상을 각각 세 차례 씩 수상했습니다.
국제적으로는 1987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Surrogate Mother》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1989년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Aje Aje Bara Aje》로 다시 여우주연상을 차지하며 한국 여배우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습니다.
강수연
강수연의 눈부신 커리어는 그녀가 주요 국제 영화제에서 최고상을 수상한 최초의 한국 배우였다는 점에서 더욱 빛납니다. 이는 이후 한국 배우들에게 길을 열어준 선구적 업적으로 평가됩니다.


그녀는 당시 출연료가 수억 원대에 이르렀고, 광고 출연료는 4억 원을 초과했다는 보도도 있으며, 이는 한국 배우 최초의 높은 개런티 사례였습니다. 비록 1994년 영화 《Days of Roses》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그녀는 연기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고 꾸준히 활동했습니다.
2001년 드라마 《Women of the World》로 TV에 복귀한 이후, 가끔 영화에도 출연하며 영화 관련 행사에 자주 등장했습니다. 2015년에는 부산국제영화제 공동 집행위원장으로 선임되어, 행정 경험이 없음에도 헌신과 뛰어난 리더십으로 호평을 받았습니다.
나영희
나영희는 1980년대에 전성기를 맞았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발히 활동 중인 베테랑 배우입니다. 1980년 MBC 제12기 공채 탤런트로 데뷔해 초창기에는 주로 영화에 출연했습니다.
1980년대에는 에로 영화로도 유명했는데, 특히 1988년 영화 《Prostitution》은 엄청난 인기를 끌며 한국 최고 흥행작이었습니다. 당시 주로 비극적이고 순수한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최근에는 강렬한 악역이나 코믹한 연기로 이미지 변신을 보이며 연기 스펙트럼을 넓혔습니다.


1990년대 이후에는 TV 중심으로 활동을 전환했고, 《그들이 사는 세상》, 《아내의 자격》, 《내 남자의 비밀》, 《옥탑방 왕세자》, 《굿 닥터》, 《별에서 온 그대》 등 다수의 히트작에 출연하며 신뢰받는 중견 여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나영희
나영희는 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에서 천송이의 어머니 양미연 역으로 인상 깊은 연기를 펼치며 시청률 28%를 기록해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2015년 드라마 《이 가족이 왜 이래》에서는 당당하고 유능한 커리어우먼 백설희 역을 맡아 연기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같은 해 드라마 《프로듀사》에서는 냉철한 연예기획사 대표 변미숙 역을 연기하며 인기를 더욱 끌었으며, 이후에도 《내 연애의 기억》, 《화려한 유혹》, 《운명과 분노》, 《푸른 바다의 전설》 등 호평 받은 작품에 꾸준히 출연했습니다.
그녀의 방대한 필모그래피는 주요 포털에 쉽게 확인할 수 있으며, 오늘날 나영희는 “신뢰할 수 있는 연기자를 믿고 보는 여배우”라는 별명을 얻으며 중견 여배우 중 가장 수요가 높은 인물로 평가받습니다.
이미연
이미연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활발한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1980년대 청순하고 순수한 하이틴 이미지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1988년 드라마 '연애의 기쁨'으로 데뷔했고, '사랑의 불시착 2'에서 순진하고 사랑스러운 여고생 역을 맡아 이름을 알렸습니다.
그녀는 '행복은 성적에 비례하지 않는다', '때때로 하늘을 보자' 같은 히트 10대 영화에 출연하며 명성을 쌓았고, 당대 최고의 청춘 아이콘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녀는 첫사랑과 순수함의 상징으로 여겨졌고, 심지어 롯데 가나 초콜릿의 모델이 되기도 했습니다.


90년대 중후반, 이미연은 <넘버3>, <모텔 선인장>, <여고괴담> 등 비평가들의 극찬을 받은 영화에 출연하며 성숙한 연기를 선보였습니다. 잠시 TV에서 물러난 후 1999년 복귀하여 2001년 인기 사극 <명성황후>에서 명성황후의 어린 시절을 연기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압도적인 존재감과 뛰어난 연기력으로 찬사를 받았습니다.
이미연
이미연은 2000년 영화 《Pisces》로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2002년 영화 《Addiction》으로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추가했습니다. 이후 드라마 《Crazy in Love》, 《김만덕》, 《응답하라 1998》 등에 출연하며 꾸준히 연기력을 선보였습니다.


2001년 드라마 《Empress Myeongseong》은 그녀의 대표작으로 꼽히며 그녀의 커리어에 큰 전환점이 되었고, 이후 중반 이후부터는 드라마 출연이 드물어졌습니다.
가장 최근에는 2013년 리얼리티쇼 《꽃보다 누나》에 출연해 평소의 차분한 이미지와는 다른 친근하고 유쾌한 면모가 주목받았으며, 술을 잘 마신다는 성향까지 알려져 팬들에게 놀라움을 안겼습니다.
옥소리
배우 옥소리는 1989년 퍼시픽코스메틱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했으며, 이후 곧바로 영화 《구로 아리랑》에서 종미 역으로 연기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이후 《비 오는 날의 수채화》, 《청춘화》, 《백야》, 《Karuna》 등 여러 유명 영화와 드라마 《Land of Humans》, 《이모 옥》, 《연어가 돌아올 때》, 《A Thousand and One Nights》, 《Shadows of Old Love》 등에 출연했습니다.


1995년 배우 박철과 결혼해 업계에서 모범적인 커플로 여겨졌지만, 2007년 그들의 결혼이 실은 위장 결혼이었다는 스캔들이 터지면서 이미지가 붕괴되었습니다. 옥소리의 불륜 사실이 드러나 극심한 비난을 받았고,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형을 선고받으며 연예계 논란의 중심에 섰습니다.
옥소리
2014년 3월 SBS 《한밤의 TV연예》에 출연해 연예계 복귀 의지를 강하게 표명했고, 같은 달 tvN 《택시》에 출연해 “모든 법적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밝혔습니다. 하지만 며칠 뒤 <Sunday Newspaper>는 그녀와 현재의 이탈리아인 남편이 기소 유예 상태에 있다는 단독 보도를 내며 이전 발언과 상반된 사실을 전했습니다.


그녀의 복귀 시도 소식은 대중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방송 중 헤지웅 해설위원은 복귀 논란에 대해 옹호하는 발언을 했습니다. 하지만 다음 날 기소 유예 관련 정보가 공개되며 비판을 받았고, 제작진은 시청자들에게 공식 사과를 했습니다. 결국 여론이 돌아서고 복귀 계획이 좌절되면서 옥소리는 조용히 물러나며 대만으로 돌아갔습니다.
김혜수
김혜수는 유연한 연기 스펙트럼, 카리스마 있는 화면 장악력, 자연스러운 연기력으로 대한민국 중년 여배우 중 가장 손꼽히는 배우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녀는 유머, 매력, 다재다능함을 고루 갖추어 다양한 캐릭터를 손쉽게 소화할 수 있는 독특한 재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태권도 공인 1단인 김혜수는 액션 장면에 적합한 인물을 찾던 광고 감독에게 발탁되어 1985년 16세의 나이에 네슬레 밀로 광고에서 태권도 소녀로 데뷔했습니다.


그 재능은 영화감독 이황림의 눈에 띄어 1986년 영화 《깜보》(Kambo)에서 주연을 맡으며 본격적인 연기 경력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마지막 겨울》(The Last Winter), 《어른은 몰라요》(Adults Don’t Know) 등 주목할 만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그녀를 스타덤에 올린 결정적 작품은 《첫사랑》(First Love)으로, 이 작품을 통해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역대 최연소 수상자가 되었습니다.
초기에는 청순한 이미지로 알려졌지만, 이후 시트콤 《세 가족》(Three Families Under One Roof)에서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을 선보이며 과감한 이미지 변신을 감행했고, 이는 당시 큰 화제를 불러왔습니다.
김혜수
김혜수는 10대 시절 데뷔한 이후 지난 35년 동안 단지 자리를 지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위상을 더욱 높여온 드문 사례입니다. 1980년대 활동했던 많은 동료들이 향수 속에 사라진 반면, 그녀는 여전히 일류 배우로서 전성기를 유지하고 있으며, 강렬한 연기력과 독보적인 존재감 덕분에 많은 여성들에게 롤모델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녀의 화려한 경력은 수상 내역으로도 입증됩니다. 한국의 3대 영화상에서만 여우주연상을 다섯 차례 수상했으며, 3대 방송사 연기 대상에서도 최우수 연기상을 세 번, 그리고 권위 있는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여우주연상을 두 차례 수상했습니다.
2000년대에는 영화 《타짜》(Tazza), 《도둑들》(The Thieves), 《관상》(The Face Reader), 《차이나타운》(Chinatown), 《굿바이 싱글》(Goodbye Single)뿐만 아니라 드라마 《스타일》(Style), 《직장의 신》(God of Workplace), 《시그널》(Signal)에서도 잇따라 히트작을 내며 비평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습니다. 특히 《도둑들》은 약 1,300만 관객을 동원하며 큰 흥행을 이끌었고, 이로 인해 김혜수는 “1천만 배우”라는 타이틀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조용원
배우 조용원은 원조 하이틴 스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정여중 3학년 때, 걸스카우트 활동에 참여한 선배들을 따라 오디션에 동행했고, 그곳에서 방송국 직원의 권유로 미스롯데 대회에 응모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제8회 KBS 공개 탤런트 모집에 선발되며 연예계에 발을 들였습니다.


한때 김희애, 전인화와 함께 “중앙대학교 트로이카”로 불렸으며,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높았습니다. 그녀는 떠오르는 배우였을 뿐 아니라 중앙대학교와 와세다대학교에서 모두 학급 상위권을 차지한 뛰어난 학생이었습니다.
조용원에 따르면, 대학 신입생 시절 교통사고로 본인과 어머니의 치료비 부담이 매우 컸으며, 유학 중 수입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장학금을 따내며 학업 우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했다고 합니다.
조용원
조용원은 1982년 KBS에서 방송된 100주년 특집 드라마 《소리의 빛》에 단역으로 출연하며 연기자로 데뷔했습니다. 초기 경력 동안에는 단막극, 특별기획드라마, 광고 등의 역할을 주로 맡았고, 《보통 사람들》 출연을 통해 서서히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인 전환점은 하명중 감독의 영화 《타는 태양》으로, 백상예술대상 신인여우상과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포함한 다수의 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1985년 큰 교통사고로 약 8개월 동안 활동이 중단되었고, 1986년 영화 《긴 여정, 긴 터널》로 복귀하여 다양한 영화와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1990년에는 일본 와세다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석사 과정을 밟았습니다.
유학을 마친 후 1995년 말 한국으로 돌아와 영화 《정글 스토리》로 연기 활동을 재개했습니다. 이후 몇몇 작품에 출연했으나, 2003년 《명일천애》 이후 연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박미령
탤런트 박미령은 1980년대 대표적인 하이틴 스타 중 한 명이었습니다. 초등학교 때부터 십대 잡지 《여고시대》 모델로 연예계에 입문했으며, 당시의 하이틴 스타였던 하희라, 채시라, 김혜선을 비롯해 여러 미래 스타들과 함께 활동했습니다. 그녀는 고등학생 모델의 신분으로 활동한 최초의 인물이었으며, 화장품 브랜드 모델로도 고등학생으로서는 처음 기용되었습니다. 또한 KBS 《청소년 행진》에서 MC로도 활동하며 인지도를 높였습니다.


그러나 전성기와 동시에 큰 관심을 받던 그녀는 21세에 가수 김종진과 돌연 결혼을 결정했습니다. 과거 TV 출연에서 두 사람이 앨범 녹음 중 만나게 되었다고 밝히며, 가족을 일찍 꾸리고 싶었던 이유가 부모님의 이혼 경험 때문이었다고 전했습니다.
박미령
결혼 후 행복이 기대되던 하이틴 스타였던 박미령은 2016년 TV조선 《솔직한 연예 토크 호박씨》에서 깊은 개인사를 공개하며 충격을 줬습니다. 그녀는 20대 후반 만성질환과 싸운 후 굿이 되었다고 고백했고, 굿을 하기 전 전남편과 헤어졌음을 밝혔습니다. 그녀의 이야기는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이끌어냈습니다.


방송에서 그녀는 병으로 인한 고통으로 자살 시도까지 했던 아픈 과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고, 그 시기에 남편과 아들을 모두 잃은 슬픔을 표현했습니다. 오래 꿈꾸던 행복한 가족이 결국 사라졌다고 한탄하며, 당시 27세였던 아들에 대한 꾸준한 사랑과 걱정을 전해 팬들과 시청자들을 감동시켰습니다.
최재성
배우 최재성은 한때 외모와 강렬한 카리스마로 사랑받던 하이틴 스타였습니다. 원래 복서가 되려 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고, 1983년 무대에서 경력을 시작한 후 같은 해 KBS 제10기 공개 탤런트로 정식 데뷔했습니다. 그의 첫 TV 출연작은 《고교일기》였습니다.


날카로운 이목구비와 강한 화면 존재감 덕분에 빠르게 주목받았고, 배우 박중훈은 젊었을 때 최재성을 가장 강력한 라이벌로 여겼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최재성은 부드럽고 잘 생긴 외모로 반항적인 고등학생 캐릭터를 주로 연기하며 큰 인기를 끌었고, 50대가 된 지금도 투박하고 남성적인 매력을 유지하며 눈에 띄는 중년 배우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최재성
1980년대 대표적인 터프가이로 알려진 최재성은 1995년 드라마 《모래시계》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본격적인 인지도를 끌었습니다. 이후 영화 《외국인 공포》에서 오혜성 역할을 맡아 눈에 띄는 외모로 스타덤에 올랐고, 이후 수많은 프로젝트에 출연했습니다.


많은 배우처럼 슬럼프를 겪기도 했지만, 드라마 《와일드 타임즈》에서 마루오카 형사 역으로 완전히 복귀하며 경력을 다시 불태웠습니다. 이후 《개와 늑대의 시간》, 《불멸의 이순신》, 《연개소문》, 《천추태후》와 같은 인기 드라마에서 성숙하고 정제된 연기를 선보이며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여명의 눈동자》에서의 연기도 호평을 받으며 그의 매력과 미모가 세월이 지나도 여전함을 증명했습니다.
최수종
배우 최수종은 현재도 활발히 활동 중인 중년 배우입니다. 젊은 시절 고등학생 과외 교사로 일하며 생계를 유지했는데, 그 학생의 아버지가 우연히 KBS 연예국 국장이었고, 최수종의 외모에 감명받아 연기를 권유했습니다.
최수종은 1987년 드라마 《사랑이 꽃피는 나무》로 연기 데뷔했으며, 처음에는 단역이었지만 종반으로 갈수록 중심 역할로 부상하며 인기를 얻어 청춘 스타로 자리잡았습니다.


이후 《서울뚝배기》에서 주연으로 발탁되어 연기력과 외모를 인정받았고, 《도시인》, 《질투》 등에서도 활약하며 생기 넘치는 젊은 배우로서 명성을 유지했습니다.
최수종
데뷔 이후로도 늘 활기찬 젊은 이미지를 지켜온 최수종은 수많은 히트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연기 외에도 각종 토크쇼 및 프로그램의 MC로 자주 출연하며 시청률을 높일 수 있는 게스트로 평가받았습니다. 30대 후반에 들어서며 그는 또 다른 커리어 변신을 시도했는데, 사극 드라마 《태조 왕건》에서 왕건 역을 맡은 것입니다.


사극에 대한 우려가 있었으나 그는 기대를 뛰어넘는 연기를 선보이며 연기력을 인정받았고, 이후 《태양인 이제마》, 《해신》, 《대조영》 등 사극 전문가로 자리잡았습니다.
최수종은 “시청률의 왕”이라고 불리며 수많은 작품이 큰 성공을 거뒀고, 동시대 배우들 사이에서도 뛰어난 연기력으로 널리 칭찬받고 있습니다.
차인표
배우 차인표는 1993년 MBC 제22기 공개 탤런트를 통해 연예계에 입문했습니다. 초기에는 단역이나 조연 역할이 대부분이었지만, 1994년 《베스트극장》의 《화이트 저니》에서 유창한 영어 연기로 강한 인상을 남기며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그 직후 드라마 《당신의 품에 사랑을》에서 주연을 맡아 단숨에 스타덤에 올랐습니다. 신인이었음에도 빼어난 외모 덕분에 빠르게 대중의 인기를 얻었습니다.


《당신의 품에 사랑을》 이후 차인표의 급부상은 언론의 화제를 모았고, 심지어 결혼 여부에 대한 루머까지 돌았습니다. 당시에는 해외 팬에게도 인기가 있었던 해외 팬층이 드문 배우였기에 ‘판타지적 존재’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차인표
차인표는 대한민국 최초의 보디빌더 스타로 평가받으며 데뷔 이후 인상적인 체격을 유지해왔습니다. 그는 작품에서 종종 탄탄한 상체를 드러내며 남성적 몸 이미지를 대중화하는 선구자 역할을 했고, 그의 영향력은 “차인표 신드롬”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나 여러 신문에서 매년 10대 사건으로 꼽혔습니다.


그는 드라마 촬영 중 신애라를 만나 군 복무 중 교제하게 되었고, 두 사람은 연예계에서 가장 사랑받는 커플 중 하나로 남아 있습니다.
첫 아들 출산 후 두 딸을 입양하며 적극적으로 자원봉사 및 기부 활동에 참여했고, 이러한 노력들은 한국 사회에서 입양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조보석
배우 조보석은 “주얼리 정”이라는 별명으로 잘 알려진 중년 배우입니다. 그는 1986년 특별 KBS 공개 탤런트를 통해 입문했으며, 6․25 특집 드라마 《백마고지》로 데뷔했습니다. 이후 《영 느티나무》, 《사모곡》 등의 주연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고, 1987년 사극 드라마 《사모곡》에서 달서 역으로 출연하며 신인상을 수상했습니다.


1998년부터 1999년 사이에는 MBC 드라마 《일일드라마 리포트》에서 남자주인공 박기정 역을 맡아 일일 드라마 최고 시청률 57.3%를 기록했습니다. 그의 주요 드라마 작품으로는 《가시고기》, 《인생은 아름다워》, 《대조영》, 《무신》 등이 있으며, 영화로는 《포 아그네스》,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등이 있습니다.
조보석
2009년 MBC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 출연하여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습니다. 그는 교활하고 어눌하며 다소 불쌍한 캐릭터를 능숙하게 연기했고, 한때 이미지에 대한 고민이 있었지만 자신에게 잘 맞는 캐릭터를 선택하여 이미지 변신에 성공했습니다. 시트콤의 성공 덕분에 그해 MBC 연예대상 시트콤 부문 남자우수상도 수상했습니다.


평소에는 단정하고 신사다운 이미지였던 조보석의 코믹한 연기에 많은 시청자가 놀랐지만, 그는 해당 드라마 속 캐릭터가 실제 자신의 성격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었다고 밝혔습니다. 그의 뛰어난 다재다능함은 거의 어떤 캐릭터든 소화할 수 있는 배우라는 평을 받게 했습니다.
신성우
가수 겸 배우 신성우는 1982년 여러 밴드와 언더그라운드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1987년 부활 밴드의 리드 보컬로 정식 음악 경력을 시작했습니다. 첫 앨범 《투워즈 투모로우》(1992)를 발표하며 솔로 아티스트로 나섰습니다.


그는 강인한 체격, 빼어난 외모, 큰 키, 파워풀한 목소리로 ‘테리우스’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처음에는 외모가 음악보다 더 주목받았지만, 그는 싱어송라이터로서 꾸준히 음악적 기여를 이어갔습니다.
두 번째 앨범에서는 헤비메탈과 하드락을 혼합한 독특한 사운드를 선보였고, 타이틀곡 《황혼에 기대는 이유》를 포함해 주류 인기를 쫓기보다 자신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습니다. 이후 밴드 ‘지니’를 결성해 《이것은 무엇인가》, 《Right Life》 등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신성우
1998년 뮤지컬 《드라큘라》 출연을 시작으로 뮤지컬 배우로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1999년 이후 뮤지컬 배우로 성공적인 전환에 성공했고, 《삼총사》, 《모차르트 오페라 록》, 《체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One Day》, 《메피스토》, 《The Iron Mask》 등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하며 뮤지컬계의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공연 활동 외에도 2016년부터는 백석대학교 뮤지컬예술학과 전임교수로도 활동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 초반부터는 드라마 《첫사랑》, 《12월의 열대야》, 《친애하는 당신에게》 등에도 출연했고, 2014년 예능 프로그램 《룸메이트》에서 ‘뉴맘’이라는 애칭을 얻으며 사랑받았습니다.
박신양
배우 박신양은 캐릭터를 깊이 분석하고 재해석하는 능력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습니다. 1986년 연극 《햄릿》의 주연으로 연기를 시작하고, 1987년 연극 《전쟁과 평화》, 1988년 《무기와 인간》에서 조연으로 활동하며 무대 기반을 다졌습니다.
그는 대학 동기 양윤호 감독의 작품 《바리어블 레인》으로 영화 데뷔했으며, 이 작품은 골든크라운영화제 청년부문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첫 주연작 《유리》에 출연해 칸영화제 비평가주간에 한국 최초로 초청된 작품이 되었고, “괴물 신인”이라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백상예술대상과 청룡영화상에서 신인남우상을 수상했습니다.
박신양
박신양은 1996년 MBC 드라마 《사과꽃 향기》에서 백성덕 역으로 주연을 맡으며 본격적인 인지도를 확보했습니다. 그때까지 그는 상대적으로 무명이었지만, 김혜수가 그의 연기를 보고 강하게 추천하면서 캐스팅되었습니다.


이후 1997년 드라마 《편지》와 1998년 《약속》에 출연해 큰 흥행을 기록했고, 여러 영화제에서 인기상과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며 1990년대 멜로 드라마의 대표 배우로 자리매김했습니다. 2004년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Lovers in Paris)에서 한기주 역을 맡아 김정은과 함께 SBS 연기대상 대상도 수상했습니다.
박신양은 이후에도 활동을 이어가며, 최근 작품으로는 영화 《박수근달》이 있습니다.
최민수
배우 최민수는 연예계에서 종종 ‘터프가이’로 불립니다. 박봉성의 만화를 원작으로 한 영화 《신의 아들》에서 주연으로 데뷔하며 강렬한 시작을 알렸습니다. 이후 드라마 《꽃미미》와 여러 영화에 출연했지만 초기 작품들은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습니다.
그러나 영화 《남부군》에서 시인 김영 역을 맡아 인상 깊은 연기를 선보였고, MBC 드라마 《고개 숙인 남자》와 《무동댁》으로 극적인 인기를 얻으며 주역 배우로 자리잡았습니다.


최민수는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와 영화 《결혼 이야기》의 대성공을 통해 국민적 인지도를 얻게 되었고, 1993년 드라마 《하늘을 나는 남자》에서 악역 갱스터 역을 맡아 터프하고 카리스마 넘치는 이미지를 확립했습니다.
최민수
최민수는 1990년대 대표 드라마 《모래시계》에서 “이렇게 하면 널 가질 수 있을 줄 알았다!”라는 명대사를 남기며 일명 ‘모래시계 신드롬’을 일으켰습니다. 이후 그는 캐나다 미스코리아 진 출신 강주은과 결혼했습니다.


2020년 KBS1TV 《모닝와이드》 출연에서 강주은은 캐나다에서 미스코리아 출전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최민수를 처음 만났다고 밝히며, 만난 지 하루 만에 프러포즈를 받았다는 폭탄 고백으로 대중을 웃게 했고, “터프가이 최민수도 긴장하게 만든 여자”라는 별명을 얻었습니다.
2021년 예능 프로그램 《라디오스타》에서 두 사람은 산 속에서 2년간 은둔 생활을 했다고 이야기하며 조용한 일상을 팬들에게 전했습니다.